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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 Story

몸이 멀어지면 사랑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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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멀어지면 사랑이 솟는다

"아웃오브안중 아웃오브마인드" 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나도 그럴 것이다 생각했다.

난 한국나이 23살이 되자마자 거주지의 기준으로 독립을 했다. 군대까지 포함한다면 21살이 되자마자일 것이다.

 

독립전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전의 난 학생 신분이었다. 부모님 집에서 같이 살았어야 했으니 당연히 부모님 말씀을 따랐어야했다. 따라야 하는 것과 따르는 것은 별개이므로 따랐어야했지만 따르지 않은 부분도 많다. 특히 어머니께선 굉장히 언짢아하는 경우가 많으셨다. 사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난 어머니께 만족을 드리려 부단히 노력을 많이 했다. 결코 만족시켜드리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지 난 노력을 했다. 뭔가 칭찬받아 마땅한 행동이나 결과가 있었을 땐 당연한듯이 넘어갔고, 무언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거나 어머니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땐 꾸중을 들었던 것 같다. 내 기억의 왜곡일까. 물론 이따금에 한번씩 잔잔한 사고를 치긴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땐 모범적으로 학창시절을 보낸 것 같은데 어머니 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을리가 없었다. 

반대로 아버지와는 큰 트러블은 없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대화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대화를 할때면 서로의 관심사가 비슷해 얘기를 해나가곤 했으나 역시나 길게 시간을 낼 순 없었다. 그때의 부모님, 그리고 그때의 나에겐 가족간의 대화보단 혼자 앉아서 하는 공부가 훨씬 더 중요하다라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지금은 전혀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형과의 관계도 아버지와의 관계만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두살 터울이 있는 우린 같은 초중고를 다녔음에도 집이나 학교에서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서먹서먹한 관계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릴땐 여느 형제와 비슷하게 싸우기도 했지만 학년이 올라갈 수록 마주칠 기회가 없어짐에 서먹해졌다는 말이 더 맞다.

 

독립후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하면 된다. 그것들에 대한 책임만 내가 지면 된다.

이것이 내가 독립 후 늘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가족과 함께 있었을 땐 내가 혼자 결정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물론 군대에서도 내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군 입대가 가족과 떨어져 살게된 첫 이유였는데 그때 처음으로 애틋함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훈련소에서의 포상으로 주어졌던 전화, 난 왜였던건지 두번의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우시면 어떡하나 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첫번째 전화통화 기회를 썼다. 역시나 울면서 전화를 받으셨고 난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씩씩하게 전화를 잘 끝냈다. 다음은 아버지였다. 별거 아니니 조심히 군생활 하라 이런류의 대화를 예상하고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한번에 무너졌다. 잠깐 갸웃했다가 상황파악이 됐고 내눈에도 눈물이 한바가지 흘러내렸다. 서로 말을 잇지 못했고 제대로된 대화는 할 수 없었다. 자대가서 다시 전화를 하겠다 하고 끊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눈가가 뜨끈해질만큼 생생한 기억이다. 아마 가족의 대한 사랑의 싹이 이때의 눈물을 먹고 자라난 것 같다. 

 

입대로 인한 가족과의 이별은 전역을 하고나서도 이어졌다. 전역한지 2주만에 호주에 어학연수를 왔고 타지로 간 사람들이 보통 겪는다는 3개월마다 한번씩 돌아오는 향수병이 나에게도 예외없이 찾아왔다. 그래도 그땐 몇개월 뒤면 한국에 돌아갈테니 조금만 참자 라는 생각이었다가 몇년이 지나고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건 한 두번을 제외하곤 일년에 한번씩은 한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몇번의 한국 방문을 거치면서 느끼게된 건 꼭 3주정도가 지나가게되면 어머니의 잔소리가 심해진다는 것이었다. 첫 1~2주는 참 좋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사실 이것뿐만이 아니라 형과 꽤 떨어져 살다가 호주와서 오랜만에 만나 같이 살게됐는데 그기간이 한 2년쯤 아마 3년이 안됐던 것 같다. 처음에는 아주 사이좋게 지내다가 어느샌가 다툼이 생기게됐다.

 

지금은 나를 제외한 가족은 모두 한국에 있다. 옆에 없다보니 내 스스로 가족을 떠올리게되고 늘 좋았던 기억만 생각이 난다. 아마 내 스스로가 과거의 사건들을 다 좋게 포장을 하려하는 것 같다. 그 듣기 싫었던 잔소리들도, 그래 그때 그건 사랑이었지. 나에게 줬던 그 스트레스들을 떠올리면서도, 그래 그건 사랑이었어. 표현을 하지 않았어도 다 깊은 곳에 사랑을 가지고 나를 대했던거라 믿게된다.

 

독립 후, 내 자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게 됐다. 모든 결정들은 나의 현재이건 나의 미래이건 나를 위해 만들어진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부터 아침을 먹는지 안 먹는지, 먹으면 어떤 것을 먹는지, 해야할 일을 할지 아니면 하루 미룰지, 어떤 것들을 우선순위로 둬야하는지 등등. 물론 결정을 하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늘 플래너를 쓰지만 다 못해내는 경우가 더 많은데 이경우다. 그래도 괜찮은 건 이 모든 것의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니 말이다. 나의 가족 모두 이 부분을 존중해주는 것 같다. 나의 결정이나 하고 있는 일에 걱정은 하시지만 간섭은 하지 않으니 가족들과 내 얘기를 독립전보다 더 잘 나눌 수 있게 된 것 같다. 난 가족들의 생각이 궁금하고 일상들이 궁금해졌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의 간섭아닌 관심이 사랑의 꽃을 피우고 있는거라 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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